22세기 사어 수집가

종언

지금껏 여러 영역에서 무엇인가에 대한 ‘종언’이 끝없이 선언되어왔다. 그러나 그러한 선언이 실질적으로 들어맞은 적은 거의 없으며, 기껏해야 누구나 뻔히 알 수 있을 다 끝난 일에 대한 사망진단 같은 것만이 그나마 의미도 재미도 없이 옳은 것으로 여겨졌을 뿐이다. 위대한 예언자의 자세를 빌려 음울하게 읊조리는 무엇인가에 대한 종언 선고는 그것의 천세만세를 기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22세기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이러한 민망한 상황이 지속되자 결국 종언의 종언마저 선언되고 말았는데, 이제 거기 귀를 기울이는 이는 없다.


조화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점차 생화 대신 조화를 무덤에 가져갔다. 그리고 모든 무덤들이 조화들로 풍성하게 장식되었을 때, 사람들은 더 이상 무덤을 찾지 않았다. 그들이 두고 간 조화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이상 조화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온통 검정인 곳에서 살아가다 보면 검정을 제외한 모든 색들을 갈망하게 된다. 충족되지 않는 갈망이 실제를 잊게 한다. 정전은 고작 일주일 지속되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검은 암흑 속에서 서서히 질식했다.


거울

너는 언제나 너 자신을 나라고 불렀다. 내가 나를 너라고 부르듯이. 여러 조각으로 분열된 하나의 정신. 나와 너로 나뉜 하나의 몸. 우리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우리 속에서 살아간다. 서로가 서로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원본과 복제품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나라고 이름 붙인 내 안의 너와 이인칭으로 거리를 두어 불렀던 너라는 이름 안의 나를 매순간 불러들이면서. 무수한 눈송이들 중에서도 아주 유사한 무늬를 지녔다는 착각으로. 하늘을 향해 끝없이 자라나는 가지들 고유의 움직임, 그 가지와 가지 끝의 녹색 잎몸 위를 번져나가는 그 무수한 잎맥의 다채로운 무늬들, 제 각각 다 다른 움직임과 생김새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보편적인 기준으로 분류했을 때 어떤 커다란 공통점 아래 묶일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그렇게 기어이, 가까스로, 서로가 서로를 닮았다고 믿는 그 믿음 속의 뿌리 깊은 오해로.